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사해 운동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1950년대 후반, 제사해 운동이라는 허황된 정책 때문에 대규모 참사를 빚은 [[중국 정부]]와 마오쩌둥은 이후에는 정신을 차려서 대약진보다 더한 [[문화대혁명]]의 광풍 속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식량증산 정책을 실행했다. 참새를 말살시키려 했다는 큰 오판을 저지르긴 했지만, 앞서 언급했듯이 토법고로 같은 말도 안 되는 정책이 펼쳐졌던 중화학 공업 분야와 다르게 농업 쪽은 농부의 아들이었던 마오쩌둥이 아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. 따라서 제사해 운동 이후에는 그럭저럭 합리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. 대표적으로 농약 보급, 화학비료 도입, 광범위한 개간사업[* 이것은 부작용도 컸다. 많은 삼림이나 초원이 농경지로 개간되었다가 [[사막]]으로 변하기도 했다.] 등이 마오쩌둥 시기에 펼쳐진 식량증산 정책이었다. 비록 격감한 참새 수는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도[* [[쓰촨성]]의 한 지역의 별미였던 참새구이는 이 일로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.] 이러한 정책이 가져온 효과가 컸기 때문에 병충해의 창궐이나 병충해로 인한 기근은 막을 수 있었다. 1970년대 말까지 [[배급]]을 실시할 정도로 빠듯하긴 했지만, 10년에 1억 명씩 늘어나는 다산정책 속에서도 식량증산이 비교적 성공적이었기에 대약진운동 때처럼 인민들을 굶겨죽이지 않고 그럭저럭 부양할 수 있었다. 마오쩌둥 사후에 [[덩샤오핑]]이 집권한 1970년 말에는 9억에 이르렀고, 그 이후에는 농촌 생산제도를 개혁하고 [[계획생육정책]]을 실시하여 식량증산 압박 및 인구 압력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